Heinrich의 대학사회 이야기.


 올해 대학가에서는 정말 많은 사건들이 많았다. 서울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새로쓴 '본관점거 농성' 과 '국공립대학의 법인화'문제와 이전 지속적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어오던 등록금 문제가 폭발하여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오면서 장기간 시위를 했었던 사건들을 떠올릴것이며, 이 사건들이 터지기 이전에 대학관련 최대의 사건이었던 'KAIST사태' 역시 올해 대학가 최대의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KAIST 사태'가 터질 즈음부터, 필자는 이 사건에 대한 언론사의 보도를 유심히 살펴보았었으며, 추후 추가적 자료수집을 통해' KAIST 사태'와 관련하여 기존의 언론보도와는 약간 다른 시각으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자한다.

 참여정부시절, KAIST 총장에 서남표 MIT 석좌교수가 임명되다.

 2006년 7월, 카이스트는 로버트 러플린 총장의 사임[각주:1]으로 인해 새로운 총장으로 서남표 MIT 석좌교수가 임명된다. 서남표 석좌교수는 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였으며, 이후 MIT에 입학하여 그곳의 교수와 학과장까지 지내면서 기계공학쪽에 있어서는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각주:2]
서남표 총장은 카이스트 취임이후 '카이스트 개혁' 이라는 내용의 사업을 시작하게된다.

서남표 총장의 'KAIST 개혁'의 내용

 서남표 총장은 이후 '카이스트 개혁' 을 추진하게되는데,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하게된다. 기존 명예직정도에 불과했던 학과장의 권한을 학과의 운영권의 가진 운영자로 강화시킴과 동시에 정교수들의 경력유무에 상관없이 7년 주기로 평가하여 평가가 좋지 않은 교수들을 과감히 퇴출, 반대로 능력이 좋은 교수들에게는 최대 30%의 추가 수당 지급등의 정책을 도입하였으며, 추가적으로는 카이스트의 재정확충과 관련한 사업들을 벌였었다. 
 그리고, 이 개혁은 단순히 구조개혁을 넘어서 그 대상이 학생에게까지 미치게되는데, 그 결과가 바로 '징벌성 차등 등록금 제도' 와 '전강의 영어수업 제도' 라는 제도였다.[각주:3]

서남표총장의 개혁안의 진행과 관련한 전반적인 학생들의 여론
 
 서남표 총장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정책이었던 '징벌성 차등 차등 등록금' 제도와 '전강의 영어수업 제도' 가 도입되었을 초기에는 당시 신입생이었던 07학번 이상 학번들이 이 제도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대다수 침묵을 하는바람에[각주:4] 큰무리 없이 도입되기에 이른다.
 그 이유는'징벌성 차등 등록금제도'가 시행되었을 당시 학점기준이 3.0점 미만이었는데 평균학점 3.0점 미만의 학생들은 학내 비율로는 20%가 될까 말까한 상황이었었던것이 영향이 컸었으며, 전강의 영어수업의 경우에도 내부 불만은 있어왔으나, 그것이 표면화 되는데까지는 시간이 걸렸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총학생회를 필두로한 학생자치기구의 '차등 등록금'과 '전강의 영어수업'문제와 관련한 활동은 있어왔었으며,2010년의 경우엔 전체학생총투표까지 성사시켰었다. 고로, 카이스트 학생들이 아예 저항을 안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부록. 카이스트판 미네르바 사건

 물론, 학생들의 활동은 소극적이나마 있어왔었고, 그중 대표적 사건이 '카이스트판 미네르바 사건' 이라고 볼수있다. 당시 카이스트 재학생이 한 포털사이트에 학교측의 카이스트 개혁에 대해서 공격적인 비판을 한 게시물을 올린 사건으로써, 학교측에서 해당 학생을 고소했다가 고소를 취하한 사건이다.(참고링크: 한국일보 09.1.31.보도- 클릭- / 한국일보 09.2.3 보도 - 클릭- )
  

 2010년 7월, 서남표 총장 재임성공과 동시에 '사건이 터지다'

 개혁내내 이런저런 소리가 많았으나,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하에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은 연임에 성공하게된다[각주:5]. 그리고 '카이스트 개혁'을 계속 추진하게 되는데, 이 때쯤의 카이스트의 '징벌성 차등 등록금제도'는 3.3점으로 대폭 상승한 상황이었다. [각주:6]
 결국, 이로 인해 카이스트 재학생중 한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생기게 되는데, 이 학생은 전문계 고등학교 출신의 '로봇과학기술영재'로 입학사정관제로 입학을 하였던 케이스 였었고, 이후 100일간 총 네명이 자살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게되고, 이 사건등이 여러분들이 언론사에서 접한 'KAIST 사태'다.
 
KAIST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자치기구들의 활동.

 첫번째 사망자가 발생하였을 당시, 총학생회장단, 동아리연합회장등은 사망자의 빈소에 방문하여 조문을 하였고, 이후 1/13일 토론회형식의 공청회를 열어 문제의 해결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이후, 추가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서남표 총장과의 공개 면담회를 진행하게 되나, 큰 성과가 없었다. 
 결국, 카이스트 총학생회는 비상학생총회를 공지하기에 이르고, 이 학생총회는 발의가 된지 67시간만에 성사되기에 이른다. 
 (사족이지만, 학생총회에서 '학교본부측(=서남표총장)의 카이스트 개혁안 실패인정 안건이 부결되었으나, 이것은 안건통과 정족수기준에서 10명을 채우지 못해서 부결이 된것이며 실제로는 반대표가 더 많았다. 이 배경에는 당시 자극적이고 과도한 언론의 보도로 인한 역풍으로 보인다.)

KAIST사태 당시의 KAIST 학생들의 여론.

 사실, 이 이전부터 불만과 비판이 있어왔었고, 이번일로 인해 본격적으로 차등등록금제도와 전강의 영어수업에 대한 비판과 활동에 대한 엄청난 지지를 하였으나, 언론의 과도한 보도등으로 인해 다소 불편해 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다소 신중론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KAIST 혁신비상위원회(혁신위)의 활동.
 
 비상학생총회 이후, 교수와 학생대표자 중심으로 KAIST 혁신위원회가 결성되고, 본격적으로 기존의 정책노선에서 생겨왔던 문제점들을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학교측에서 이 요구안건들을 수용하지 않는듯한 포지션을 취해 한동안 논란이 되었으나, 이후 대부분 안건들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결과 차등등록금제도, 전강의영어수업[각주:7], 5학년 이상의 초과학기자에게 불리한 제도등이 수정,폐지되었으며 교양수업에서의 전인교육이 강화되었다.[각주:8]
 (여담이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학생들이 원하는 부분이 제대로 반영되었다 라고 평가하기엔 리스크가 따르는 부분들이 있다.)
 
 
부록. KAIST 사태 당시의 언론보도에 대한 문제점.

 KAIST 사태가 터지기전이나, 터지고 난뒤나 언론의 보도는 정말 좋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었다. 서남표 총장이 '카이스트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시기에는 '대학교육 개혁의 선구자' 등의 수식어를 붙여가면서 추켜세우더니, KAIST 사태가 터진 이후에는 카이스트에 있어왔던 문제점과 사태의 진행같이 중요한 부분보다는 '자살' 이라는 용어에 극단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보도를 했었고, 이후에는 정치적 이념대결의 경향까지 보였었다는 것이다.
 결국 KAIST 사태 당시에서는 카이스트의 구성원들은 없었고, 언론사들의 자극적보도만 남았다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 최대의 대학가 이슈였던 카이스트 사태는 굉장히 오래동안 있어왔던 문제들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대중에게 영향을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수 있으며, 우리나라 대학사(史)에 있어서도 중대한 사건으로 알려질것이다.
 비단 'KAIST 사태'가 KAIST의 사태만은 아닐것이다. 지금현재도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학교측 맘대로 식의 불소통적 사업추진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재학생들이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을것이다.

 이상으로, KAIST 사태에 대한 간단한 포스트를 마치겠으며, 다음 포스트로는 국공립대학 법인화 연작 마지막편, '우리나라 국공립대 법인화에 대한 총론'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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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조바심에서 남깁니다. 이포스트는 기존의 포스트들과는 달리 '이슈를 만드는' 뉘앙스의 포스트가 아닙니다. 사태에 대한 일부 떡밥과 오류에 대해서 어느정도 제대로 알려져야될 부분과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한 요약정리가 메인의도입니다. 
  1. 로버트 러플린 총장의 사임은 로버트 러플린 총장발 카이스트 개혁 사업이 크게 성과를 보지 못했으며, 총장 - 교수진 갈등의 심화가 그 원인이었다. [본문으로]
  2. 이와 동시에 학과장 시절 과감한 개혁정책을 한것으로도 유명하다 [본문으로]
  3. 물론, 이것 말고도 더있긴 하지만... [본문으로]
  4. 이부분과 관련해서는 학교측의 노력(?)과 동시에, 07학번부터 적용이 되었던 문제라 상급생들이 함부로 활동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었다. [본문으로]
  5. 사실, 이와 관련해서는 서남표 총장의 학내정치력이 더 크게 작용한 부분이 있다. [본문으로]
  6. 정확히는 3.3점부터 기성회비에 대한 지원이 중단, 3.0점 부터 본격적인 차등등록금제도의 적용점수임. [본문으로]
  7. ... 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체감할 정도는 아닌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8. 이 이외의 개선사항에 대해서는 KAIST 학보사의 기사들을 참고할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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